제목
희망을 연주하는 사람 (빌4,4)12월 18일 수요예배
말씀: 빌립보서 4장 4절
희망을 연주하는 사람(빌4,4)
최근 우리나라에 기쁜 소식이 있다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일 텐데요.
지난주 그녀의 수상소감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중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에도 언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묻고,
언어는 이 행성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 상상하기를 고집하며,
언어는 우리를 서로 연결합니다.
우리를 서로 연결해 주는 언어,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품게 됩니다.
따라서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입니다.
문학에게 주는 이 상의 의미를 폭력의 반대편에 선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녀의 글과 수상소감은
전 세계에 고통과 폭력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함께 어두운 현실에서도 희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그녀의 글을 마주하며,
폭력으로 억압하려는 세력 앞에서도 어떻게 평화로 대처해야 하는지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 그림을 천천히 한번 보고 제목이 무얼까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주인공은 앞을 볼 수 없고 무언가로부터 눌려있는 듯 무기력해 보입니다.
동그란 구 위에 쓰러지지 않으려 왼발은 오른발을 간신히 붙잡고 있습니다.
대신 악기를 붙들고 있는데, 그마저 악기의 줄은 모두 끊어졌고 하나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나 남은 줄이라도 연주를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위에는 화면에 잘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한 빛이 비치고 있는데요.
제목을 한번 생각해 봤나요? 바로 '희망'(Hope)입니다.
이 그림은 1886년 영국 조지 프레드릭 왓츠의 작품입니다.
아마 제목에 대해 의아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어떻게 절망으로 가득한 이 그림이 희망을 상징하는 걸까요?
당시 이 그림을 본 미술 비평가들도 작품 제목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 와츠는
“단 하나의 코드로라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은 긴 경제 불황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와츠 개인적으로도 갓 태어난 딸을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 그는 이 상황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도 연주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여인을 그림으로서 희망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에 감동했던 것도 역설 안에서 발견하는 위로의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후 이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흑인인권 운동에 앞장 선 마틴 루터 킹 목사님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요.
그는 설교에서 이 그림을 언급하며
“비록 우리에게 줄 하나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그 줄을 붙잡고 희망을 연주한다면, 별빛을 보게 될 겁니다.”
라고 설교에 인용했다고 합니다.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20여 년간의 감옥 속에서
이 그림을 보고 희망을 가지고 수감생활을 했구요.
또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이 그림에 큰 감동을 받고
후에 그의 연설에서 희망을 언급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연주하라’는 문구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처럼 보이지만,
어려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신영복님 쓰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중 ‘고성 밑에서 띄우는 글’에 쓴 내용 일부를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 됨도 사실입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설한을 어떻게 견뎌 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그는 감옥 밖의 과거를 회상하며 후회하거나 미래를 포기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있지만, 생각이 갇힌 삶을 살지 않은 것이죠.
이러한 그의 삶의 자세는 자신과 같이 수감 생활을 한 사람뿐 아니라
그 글을 읽는 가족과 지인에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비록 내가 사는 곳이 절망적일지라도 희망을 심고 싹을 틔우도록 도전해보도록 용기를 줍니다.
감옥에서도 기쁨에 대해서 노래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감옥에 있었습니다.
처형당할 수도 있고, 언제 감옥에 나올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옥 안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자신을 항상 도와주고 후원해 준 빌립보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감사를 전하며,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해주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기뻐하라는 말이 무려 10번이 넘게 나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로마가 통치하는 상황이라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신변에 위험을 받고, 두려운 시대였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감옥에서도 바울 자신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절망 속에서도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 부르는데요.
그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불가능 속에서도 기쁨을 찾는 것이 믿음의 원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중 시험 기간에 이 말씀 외운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능력이 자신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은 4장 12절 말씀과 함께 봐야 하는데요.
'이 능력이 나오기까지
비천한, 풍족함, 배부름, 굶주림, 풍족함, 궁핍함을 경험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절망과 어려움의 연속인 가운데 매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르는 때이지만,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을 통해서 다른 죄수들에게 하나님이 전해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바깥사람에게도 이 소식 하나님이 전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절망이 아니라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기쁨이 그를 감옥에 가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도 감옥 속에 있더라도 감옥에 있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바울이 말한 이 기쁨이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신앙인에게 희망은 단순히 다 잘될거야 라고 삶을 낙관하거나 부정적인 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포기하지 않고 남은 한줄로 연주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작은 빛을 비추고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빛을 따라가다 보면 크신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3학년은 앞으로의 진로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빛을 따라 자기만의 보폭으로 걸어 나가길 바랍니다.
1,2학년들은 시험 결과에 풀죽지 말고, 힘을 내고 일어섰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수피아 내일은 세계로'를 마음에 새기고
희망을 연주하는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